<A Crowd> 3부작 중 <Belief>
︎닐 영 (영화평론가)
- #Best Scene, 리뷰 한국영화 2000-2020, 아카이브 프리즘 #5, 한국영상자료원, 2021. 06., p.175
- #Best Scene, 리뷰 한국영화 2000-2020, 아카이브 프리즘 #5, 한국영상자료원, 2021. 06., p.175
감각적 타격으로서의 영화
“김구림 작가가 그의 획기적인 영화 ‹1/24초의 의미›의 제작과 상영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소식은 흥미롭고도 약간은 씁쓸한 이야기였다. 김구림은 실험영화의 제작을 원치 않았던 당시 충무로 사람들의 맹비난을 받았다. 그 첫 상영은 1969년 7월 21일,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하던 날, 한 뮤직홀에서 이루어졌다. 모든 사람들이 실험영화를 관람하기보다는 달에 착륙하는 모습을 텔레비전으로 보고 싶어 했고 그 덕에 뮤직홀을 대관할 수 있었다. 영화 크레디트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조차 일부는 참석을 원치 않았다.” - 필립 고먼, 런던 코리언 링크(2016)
이번 기획의 필진들은 자신만의 ‘2000- 2020 한국영화 최고의 장면’을 선택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하지만 ‘씬’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영화라면? 씬이라는 단어를 영화를 이루는 하나의 단위로 사용하는 것은 100여 년 전 시작된 극장 상영 전통의 영화 개념과 명시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용어는 이 영화라는 예술 양식이 과거에 어떠했고, 지금 어떠하며, 앞으로 어떠할 것인지 말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제한적인 정의이다. 주류 영화와 다른 방식의 영화, 그러니까 아방가르드와 실험영화들은 길들여지지 않은 주변부에서 항상 번성해 왔다. 한국에서 실험영화 제작은 다른 나라에 비해서는 한참 뒤늦게 시작되었는데, ‹1/24초의 의미›가 그 시작이라고 평가받는다. 대부분의 실험영화는 단편이며, 보통은 씬으로 나누어질 수 없는 구조로 만들어져 있다. 이번 기획을 포함하여 주류 영화 중심의 사고는 탁월한 단편실험영화들이 그들이 응당 받아야 할 만한 관심을 받지 못하게 만든다. 전쟁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나는 주연우 감독의 ‹빌리프›(Belief ) 를 2019년 12월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에서 열리는 얼터너티브영화제에서 보았다. ‹어 크라우드›가 처음으로 대중에게 선보이던 날이었다. ‹빌리프›는 감독이 디지털 스캔을 통해 ‘찾아낸’ 수백 장의 사진을 이용하여 만들어진 7분간의 빗발치는 이미지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미지의 부분 부분이 확대되어 화면을 가득 채우고, 필름 입자까지도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사진은 다양한 시기와 장소에서 이루어진 스포츠 경기와 오락 이벤트에 모인 군중들, 하늘의 구름, 재난 상황에서 피어오른 듯한 연기를 보여준다. 영화의 흐름은 매우 빨라서 매초마다 수십 개의 이미지가 섬광처럼 스쳐간다. 눈보라 같은 효과를 내면서 감각에 폭격을 가한다. 사운드 디자이너 구예지의 시끄럽고 웅웅거리는 사운드 또한 유사한 방식으로 강렬함을 자아낸다. 우주로켓이 발사될 때 나는 소리 같은, 출처를 알기 어려운 왜곡된 사운드가 들린다. (간혹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도 있는데, 혹시 아폴로 11호의 발사음은 아닐까?)
‹빌리프›는 실체적이면서도 정신적이고, 단순한 듯하면서도 불가사의한 효과를 낸다. 이 7분 동안 베이그라드의 관객들은 주류와 타협하지 않는 극단의 대안적 리얼리티와 마주하고 그 압도적 세계에 초대되었다. 이것은 관객의 눈과 귀에 관습적인 개념으로 설명할 수 없는 엄청난 자극을 가하는 감각적 타격으로서의 영화이다. 내가 뽑은 2019년 최고의 영화 20편 리스트에는 두 편의 한국 작품이 있는데 바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과 주연우 감독의 ‹빌리프›이다.
내가 이 기획을 위해 ‹빌리프›에 대해 쓰기로 결정했을 때, 나는 주연우 감독이 여성이라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혹은 아마 알고도 잊었을 것이다. 1999년 이후로, 세계 영화계는 김기덕, 박찬욱, 홍상수, 이창동, 봉준호 등 한국 남성 감독들에게 상당한 관심을 보내왔다. 20년간의 ‘남탕’이라 불릴 만한 뉴코리안시네마는 어떤 모습으로 확인되어 왔는가. ‹코리안 스린›(www.koreanscreen.com)에서 전 세계 영화평론가를 대상으로 ‘한국영화 역사상 최고의 작품’을 물어본 결과, 오직 한 편의 여성 감독 영화만이 상위 스물다섯 편 안에 이름을 올렸다. 어떤 단편영화나 실험영화도 탑100 안에 들지 못했다. (나는 ‹1/24초의 의미›가 적어도 한 표는 받았다는 사실을 안다. 내가 줬으니까.) 한국의 두 주요 영화시상식인 대종상과 오랜 중단 후 1990년에 재개된 청룡영화상에서 여성 감독은 한 번도 감독상을 수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단편 작품의 경우 2017년부터 매해 청룡영화상에서 여성 감독이 단독으로 혹은 남성 감독과의 공동 작업으로 단편영화상을 수상하였다. 가부장적 구조는 전 세계 영화에 그 탄생부터 영향을 미쳐왔고, 이러한 영향하에 2000년 이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한국영화는 압도적으로 남성에게 편중되었다. 하지만 실증적 증거가 단편영화는 여러 이유로 왜곡된 가부장적 질서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단편실험영화는 더욱더 그렇다. 좋은 영화를 찾아내려는 노력은 항상 그 보답을 받는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김구림 작가가 그의 획기적인 영화 ‹1/24초의 의미›의 제작과 상영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소식은 흥미롭고도 약간은 씁쓸한 이야기였다. 김구림은 실험영화의 제작을 원치 않았던 당시 충무로 사람들의 맹비난을 받았다. 그 첫 상영은 1969년 7월 21일,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하던 날, 한 뮤직홀에서 이루어졌다. 모든 사람들이 실험영화를 관람하기보다는 달에 착륙하는 모습을 텔레비전으로 보고 싶어 했고 그 덕에 뮤직홀을 대관할 수 있었다. 영화 크레디트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조차 일부는 참석을 원치 않았다.” - 필립 고먼, 런던 코리언 링크(2016)
이번 기획의 필진들은 자신만의 ‘2000- 2020 한국영화 최고의 장면’을 선택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하지만 ‘씬’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영화라면? 씬이라는 단어를 영화를 이루는 하나의 단위로 사용하는 것은 100여 년 전 시작된 극장 상영 전통의 영화 개념과 명시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용어는 이 영화라는 예술 양식이 과거에 어떠했고, 지금 어떠하며, 앞으로 어떠할 것인지 말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제한적인 정의이다. 주류 영화와 다른 방식의 영화, 그러니까 아방가르드와 실험영화들은 길들여지지 않은 주변부에서 항상 번성해 왔다. 한국에서 실험영화 제작은 다른 나라에 비해서는 한참 뒤늦게 시작되었는데, ‹1/24초의 의미›가 그 시작이라고 평가받는다. 대부분의 실험영화는 단편이며, 보통은 씬으로 나누어질 수 없는 구조로 만들어져 있다. 이번 기획을 포함하여 주류 영화 중심의 사고는 탁월한 단편실험영화들이 그들이 응당 받아야 할 만한 관심을 받지 못하게 만든다. 전쟁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나는 주연우 감독의 ‹빌리프›(Belief ) 를 2019년 12월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에서 열리는 얼터너티브영화제에서 보았다. ‹어 크라우드›가 처음으로 대중에게 선보이던 날이었다. ‹빌리프›는 감독이 디지털 스캔을 통해 ‘찾아낸’ 수백 장의 사진을 이용하여 만들어진 7분간의 빗발치는 이미지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미지의 부분 부분이 확대되어 화면을 가득 채우고, 필름 입자까지도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사진은 다양한 시기와 장소에서 이루어진 스포츠 경기와 오락 이벤트에 모인 군중들, 하늘의 구름, 재난 상황에서 피어오른 듯한 연기를 보여준다. 영화의 흐름은 매우 빨라서 매초마다 수십 개의 이미지가 섬광처럼 스쳐간다. 눈보라 같은 효과를 내면서 감각에 폭격을 가한다. 사운드 디자이너 구예지의 시끄럽고 웅웅거리는 사운드 또한 유사한 방식으로 강렬함을 자아낸다. 우주로켓이 발사될 때 나는 소리 같은, 출처를 알기 어려운 왜곡된 사운드가 들린다. (간혹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도 있는데, 혹시 아폴로 11호의 발사음은 아닐까?)
‹빌리프›는 실체적이면서도 정신적이고, 단순한 듯하면서도 불가사의한 효과를 낸다. 이 7분 동안 베이그라드의 관객들은 주류와 타협하지 않는 극단의 대안적 리얼리티와 마주하고 그 압도적 세계에 초대되었다. 이것은 관객의 눈과 귀에 관습적인 개념으로 설명할 수 없는 엄청난 자극을 가하는 감각적 타격으로서의 영화이다. 내가 뽑은 2019년 최고의 영화 20편 리스트에는 두 편의 한국 작품이 있는데 바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과 주연우 감독의 ‹빌리프›이다.
내가 이 기획을 위해 ‹빌리프›에 대해 쓰기로 결정했을 때, 나는 주연우 감독이 여성이라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혹은 아마 알고도 잊었을 것이다. 1999년 이후로, 세계 영화계는 김기덕, 박찬욱, 홍상수, 이창동, 봉준호 등 한국 남성 감독들에게 상당한 관심을 보내왔다. 20년간의 ‘남탕’이라 불릴 만한 뉴코리안시네마는 어떤 모습으로 확인되어 왔는가. ‹코리안 스린›(www.koreanscreen.com)에서 전 세계 영화평론가를 대상으로 ‘한국영화 역사상 최고의 작품’을 물어본 결과, 오직 한 편의 여성 감독 영화만이 상위 스물다섯 편 안에 이름을 올렸다. 어떤 단편영화나 실험영화도 탑100 안에 들지 못했다. (나는 ‹1/24초의 의미›가 적어도 한 표는 받았다는 사실을 안다. 내가 줬으니까.) 한국의 두 주요 영화시상식인 대종상과 오랜 중단 후 1990년에 재개된 청룡영화상에서 여성 감독은 한 번도 감독상을 수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단편 작품의 경우 2017년부터 매해 청룡영화상에서 여성 감독이 단독으로 혹은 남성 감독과의 공동 작업으로 단편영화상을 수상하였다. 가부장적 구조는 전 세계 영화에 그 탄생부터 영향을 미쳐왔고, 이러한 영향하에 2000년 이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한국영화는 압도적으로 남성에게 편중되었다. 하지만 실증적 증거가 단편영화는 여러 이유로 왜곡된 가부장적 질서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단편실험영화는 더욱더 그렇다. 좋은 영화를 찾아내려는 노력은 항상 그 보답을 받는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가까운 것> 작업노트
︎주연우
- <가까운 것> 홈페이지 게시, 2020
- <가까운 것> 홈페이지 게시, 2020
1.
가까운 것(The Near)은 청취의 영역에 가까운 소리와 소외된 소리를 듣는 오디오 프로젝트이다. 이 프로젝트는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지만 사람들이 잘 인지하지 못하는 소리에 주목하고 들리지만 들리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것들에 귀 기울이고 있다.
코로나19는 우리가 일상적인 풍경의 음향을 경험하는 방법을 변화시켰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변화된 일상의 풍경은 이전에 우리가 봤던 것과 보지 못했던 것, 들었던 것과 듣지 못했던 것들을 선명하게 해주었다. 이 오디오 프로젝트는 코로나19가 필요로 하는 사회적 규제와 이러한 규제들이 우리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에 주목하고 이를 특정한 장소와 시간을 가로지르는 연결의 방법으로 제안한다. 이미지와 분리된 사운드는 시각적으로 지배되는 일상생활의 영역에서 벗어나 특정 공간과 장소의 경험을 환기시킬 것이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주연우, 구예지, 박선양은 사운드워크(soundwalk)와 현장 녹음(field recording)의 형태로 소리 풍경을 기록하였다. 작업은 걷거나 대중교통을 타고 도시를 횡단하며 사람들이 모이는 곳, 모였던 곳, 머무는 곳, 지나쳐가는 곳 등에서 채집된 도시의 다양한 리듬과 독특한 목소리를 반영하였다.
프로젝트는 외부 연결(External link)과 내부 연결(Internal link)로 이루어진다. 외부 연결과 내부 연결의 각 파트는 다수의 오디오 조각으로 구성되었다. 각 오디오 조각의 파일명은 소리의 출처에 대한 정보를 표시하고 있으며, 각 파트는 밴드캠프(bandcamp)에서 앨범 단위로도 들을 수 있다. 외부 연결(external link)은 코로나19로 변화된 소리 풍경에 대한 기록이다. 첫 번째 파트와 두 번째 파트는 서울의 주요 공원 산책로와 서울 도심 거리에서의 사운드워크를, 세 번째 파트는 일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다양한 코로나19 관련 안내 방송들을 모아서 만든 오디오 작업이다. 내부 연결(Internal link)은 2021년에 진행될 예정으로 실내에 머물면서 발견한 소리 모음을 다룬다. 첫 번째 파트는 작가가 사전 리서치한 오디오 결과물의 베타 버전을 선보인다. 두 번째 파트는 물리적 거리와 시차에 상관없이 누구나 참여 가능한 공동 프로젝트로 진행된다. 가까운 것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싶은 사람은 각자의 공간에 머물면서 발견한 소리를 직접 녹음하여 참여할 수 있다.
가까운 것(The Near)은 2020년 서울을 경유하여 어디에서든 어떠한 제한 없이 만날 수 있는 형태로 존재한다. 이 프로젝트는 2021년 12월까지 공개되며, 이 기간 동안 진행될 내부 연결(Internal link) 두 번째 파트를 포함하여 참여자 인터뷰 등의 내용이 점차적으로 공유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프로젝트에서 수집된 오디오 조각들은 추후 재구성되어 새로운 형태의 오디오 작품으로 제작될 예정이다. 1차로 녹음된 결과물과 2차로 가공된 사운드의 비교 청취는 들리지 않는다고 여겼던 소리의 발견과 그 소리의 경계를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는 새로운 청취의 경험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2.
오노레 드 발자크가 인간의 보행에 대해 물었던 것처럼 나는 어떤 소리를 어떻게 듣고 있는가에 대하여 묻는다. 소리는 왜 들리는가, 어떻게 듣는가, 소리는 익숙한 정도에 따라 청취의 중요도로 선별된 것은 아닌가,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지만 사람들이 인지하지 못하고 청취의 영역에서 소외되는 소리는 소리의 바깥에 있는 것인가? 첫 번째 외부 연결은 이러한 질문들을 따라 제작된 사운드워크 작품으로 구성되었다. 이 사운드워크는 여유롭게 산보할 수 있는 서울의 경의선숲길공원, 망원한강공원, 서울숲공원, 어린이대공원, 석촌호수공원에서 진행되었다. 이 작업에서는 고정된 위치에서 마이크를 설치하고 수동적으로 들리는 소리를 중계하기보다 걷기를 통해 소리 듣기를 우선하였다. 또한 소리의 경계를 인식해 보기 위해 소리를 균형적이거나 불균형적인 환경에서 차별적으로 청취하고자 하였다. 사운드워크 참여자들은 주변과 분리되어 정적인 청취를 하는 대신 역동적이고 구체적인 소리를 듣기 위해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이러한 사운드워크의 목적은 일부러 소리를 내기도 하고 누군가의 소리를 의식하며 따라가기도 하면서 놓치기 쉬운 소리에 귀 기울이며, 듣는 행위의 미학적 유희를 발견하기 위함이다. 걸으며 듣다가, 들으며 걷다가, 잠시 멈춘다. 지금 어떤 소리가 들리는가. 우리는 무엇을 소리라고 부르는가.
3.
두 번째 외부 연결은 2020년 11월에 서울 명동의 쇼핑 거리와 광화문 광장에서 진행된 사운드워크 작품이다. 2호선 을지로입구역에서 부터 명동을 관통하여 4호선 명동역에 이르는 구간을 반복하여 걸어 다녔다. 녹음된 소리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소리는 상점에서 크게 틀어 놓은 음악 소리들이다. 거리 곳곳에서 눈에 띄는 빈 점포와 임대문의 현수막의 풍경은 사운드워크 조각에서도 확인될 만큼 한적하고 이질적인 명동의 현재이다. 광화문 광장에서는 한 곳에 머물며 반복되는 소리의 순환을 관찰하였다. 첫 번째 파트와 달리 광화문 광장에서는 계속해서 움직이는 소리의 층이 많기 때문에 고정된 위치에서 지나가는 소리들을 듣는 것이 도움 되었다. 이따금씩 들리는 노래 소리는 온종일 광화문 일대를 배회하는 확성기 차량에서 틀어 놓은 소리이며, 일정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달라지는 소리의 분포도는 현장의 교통 상황을 짐작케 한다.
*외부 연결 두 번째 파트는 상대적으로 밀집도가 높은 장소에 대한 연구로 진행되었는데 사회적 거리두기 격상에 따라 이를 지속하기 어려웠다. 추후 추이에 따라 두 번째 파트의 내용이 추가될 예정이다.
4.
세 번째 외부 연결은 코로나19로 인해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소리 풍경에 새롭게 추가된 소리들을 모아서 만든 오디오 조각 모음이다. 이 오디오 조각은 일상에서 의식적으로 녹음된 소리들로 구성되었다. 이 녹음 작업은 하루에도 몇 번씩 듣게 되는 코로나19 예방과 관련한 안내 방송에 이미 일상처럼 익숙해져 각성력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질문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조각된 것이다. 1분 내외 분량으로 녹음된 소리들은 대중교통, 쇼핑몰, 카페, 식당, 공원 등 공공장소에서 마스크 착용에 관한 안내 방송과 전자출입명부 확인을 위한 QR 코드를 인증하는 내용이다. “마스크를 착용하세요.”, “인증되었습니다.”와 같은 문장에서 우리는 즉각적인 행동을 취할 것을 요구받는다. 마스크 착용의 의무화와 신분 확인을 강요받는 시기에 녹음을 위한 1분가량의 시간은 상징적인 의미로 볼 수 있다. 이 시간은 필요한 행동을 취하는 시간인 동시에 잠시 멈추는 순간이다. 이처럼 녹음하는 행위는 소리를 듣는 것을 넘어 사회에 참여하는 형태이기도 하다.
5.
밀폐된 공간에서 가만히 소리를 들어본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 같지만 조금만 더 귀 기울여보면 미세한 볼륨의 화이트 노이즈를 확인할 수 있다. 쉽게 들리지 않지만 계속해서 소리는 공명하고 있다. 가까운 것(The Near) 프로젝트가 2020년에 사운드워크와 현장녹음을 중심으로 진행된 외부 연결(External link)로 소결된다면, 내부 연결(Internal link)은 그 확장판으로 2021년에 후속 진행될 예정이다. 내부 연결의 첫 번째 파트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밖으로 나가기 어려운 상황을 이용하여 특정 장소에서 지속적으로 생성되는 소리에 초점을 맞춘다. 오랫동안 집 안에 머물면서 발견한 첫 번째 소리는 냉장고의 모터 소리이다. 냉장고에서 발생하는 모터 작동 소리는 들리지만 들리지 않는다고 여겨지거나 일상에서 중요한 소리로 인식되지 않는 소리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냉장고에서 발생하는 소리는 냉장고의 종류(모델), 크기, 위치, 제조년도, 적재용량, 녹음 환경 등에 따라 달라졌다. 또한 냉동고와 냉장고의 내부에서 미세하게 다른 소리가 발생하고 있었다. 이에 작가는 다양한 환경에 놓인 냉장고들을 찾고 냉장고의 내외부에서 발생하는 소리를 중점적으로 녹음하였다. 이처럼 내부 연결 첫 번째 파트는 냉장고 안과 밖의 소리를 추적한 리서치 결과물을 모은 것이다. 계속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내부 연결의 첫 번째 파트는 2021년 완결된 형태로 공개될 예정이며 2020년 12월 현재 베타 버전으로써 오디오 조각의 일부를 선공개 한다.
불타는 미디어의 연대기 작가 주연우론
︎김상용(아트&테크놀로지 비평가. 서강대학교 지식융합학부 교수)
- 비디오포트레이트 展, 토탈미술관, 2017
“과거는 구원을 기다리고 있는 어떤 은밀한 목록을 함께 간직하고 있다.”
-발터 벤야민, 〈역사철학테제〉 중-
1
가변적이며 불확실하고 또한 예측할 수 없는 불안을 담고 있는 인류의 실존을 호명
흔히 산업화 이후의 매체를 소비하는 대중은 ‘지금 이곳에hic et nunc’에 있는 무언가가 미디어라는 매체에 연동될 때, 이른바 뉴미디어 매체와 수용자라는 특수한 권력관계 안에서 각 개별자는 뉴미디어 매체에 반영된 현실을 순진하게 믿어 의심치 않는 습관을 길러왔다. 그 믿음은 미디어 매체가 과학적 개발로 생산된 고도의 기술 집약적인 생산물이라는 이면에 스며있는 인간 이성에 대한 기술우위의 이데올로기가 작동한 결과이기도 하다. 작가 주연우의 신작, 〈Swarm Circulation〉2016은 이러한 점에서 우리가 믿고 신뢰하는 매체의 생산 및 확대를 거친 수용자의 재생산 과정과 더불어 그것에 부여되는 미디어문명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을 단편 실험영화의 형식을 빌려 표현하고 있는 문제작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예컨대 시대별 TV 모니터라는 하드웨어의 생산과정 및 공장의 제조 라인과 미디어의 껍질이라고 은유 할 수 있는 불타는 TV 모니터 쓰레기 더미 속 하드웨어를 헤치고 다니는 낙후된 아프리카 지역의 여러 빈민들의 큰 대비가 보여주는 이른바 ‘미디어 장치의 재활용 recycling of media devices’이라는 비유를 외피로 입고 있다.
하지만, 이 비유 속에서 정작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재활용recycling’이 아니라, ‘순환circulation’이라는 점에 있다. 다시 말해, 작가는 미디어 장치의 순환circulation of media devices을 상징적 방법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이 영상 작업을 관통하는 하나의 핵심 비주얼Key-Visuals은 각 시대별로 생산되고 있는 TV 모니터 브라운관 및 컴퓨터 부품들이 낙후된 어느 현장에서 불타는 폐기물 더미 속에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헤치며 찾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최종 종착지가 되고 있는 역설적인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이른바, ‘미디어의 껍질’들이다. 미디어의 껍질 이란, 소용을 다한 하드웨어 자체를 칭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때는 TV 브라운관 속에서, 혹은 컴퓨터 부품들 사이에서 오고 갔을 수많은 데이터들, 또는 모니터 속을 달구었을 한때의 이미지들 가운데 그것을 수용하거나 소비했을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함께 불타고 폐기되는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는 은유에 담고 있다는 것이다. 그 장치들이 한때 건강했을 때, 수용자, 곧 소비하는 주체들을 현혹케 하거나 경 도시켰던 수많은 ‘사실’과 경이로운 ‘장면’들이 이제 그 소용을 다하고 용도 폐기되는 과정에서 우리가 믿고 신뢰했던 한때의 경험들이 함께 폐기의 현장에서 무연한 연기를 내며 사라지는 ‘순환’은 생명체의 유기 적인 탄생과정에서부터 죽음에 이르는 자연의 현상을 비유적으로 차용해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 주목할 것은, 바로 ‘순환circulation’이라는 주제어에서 보여지듯이 미디어 시대의 믿음과 신뢰를 담당했던 매체의 하드웨어 부품들이 한때 선도했거나 담지했던 이른바, 트렌드trend는 이제 찾아볼 길 없이 사라지고 껍질만 남은 채 타오르는 연기 속에서 자취를 찾아 볼 길이 없게 되었지만, 바로 이러한 사라지는 현상 안 에서 역설적으로 아련하게 떠오른 주체는 과연 우리가 한때 믿고 신뢰했던 그것은 고정불변한 진리의 체계가 아니라, 항상 가변적이며 불확실하고 또한 예측할 수 없는 불안을 담고 있는 인류의 실존을 호명한다고 여긴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2
보이지 않는 조형물, 곧 ‘의미’를 조각하는 작가의 손
작가 주연우가 시도한 작품, 〈Swarm Circulation〉은 파운드 푸티지found footage 방식으로 제작된 실험 영화의 범주에 속한다. 파운드 푸티지 영상이란, 다른 사람에 의해 촬영된 영상 및 이미지 등의 자료들을 새로운 맥락으로 끌어내어 예술적으로 전유하는 영화적 실천의 한 분야이다. 이 분야의 전문가인 니콜 브레네즈Nicole Brenez는 파운드 푸티지의 장르적 특성을 다음 세 가지의 요소로 분류한다. 첫째, 기존의 필름이나 영상매체가 찍혀져 편집된 방식에서 새로운 영역으로의 외연확장 을 통한 새로운 형태의 몽타주를 구성해 낸다는 것. 둘째, 아카이브 푸티지archive footage의 필름 혹은 이미지 자체를 수작업을 통한 하나의 물질로서 다룸으로써 갖는 미학. 이것은 마치 조각품을 다루는 조각가가 물질 앞에서 갖는 작가의 구상과 흡사하다. 셋째, 파운드 푸티지는 이미지를 새로운 몽타주를 통하여 자율적으로 의미를 구성해 낸다는 것 등이다.
여기에서 특히 작가 주연우에게 돋보이는 특이한 점은 이미지 자체를 수작업을 통한 하나의 물질로서 다룸으로써 갖는 미학적 솜씨라고 할 수 있겠다. 첨단 기술의 담론 너머에 존재하는 이른바 ‘작가의 몫’이라고 하는 것은 디지털 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 대해 깊이 있는 숙고의 과정을 요청한다. 기존의 예술적 장인artistic craftsman이 담보하던 ‘손’의 전통적 중요성에서 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는 예술가의 ‘손’이 전유하던 미학적 중요성보다도 ‘데이터’가 갖는 함의는 물론, 복제된 그 데이터의 파생과 전유가 훨씬 중요해진 시대로 전환되어 버렸다. 복제에 의해 파생된 데이터가 다른 맥락에 놓이게 될 때 그 의미는 애초의 그것으로부터 간극이 발생하여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대에 여전히 ‘손’의 의미 곧, 예술가의 물질을 향한-아름다움으로 향하는 예술 행위의 기본 재료가 되는 물질, 여기서는 바로 이미지 자체라고 봐야한다- 기본적인 응시의 태도를 다시 한 번 환기하고 있다는 데에 바로 작가 주연우를 통해 디지털 시대의 예술가의 초상을 엿보게 한다는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작가 주연우에게 디지털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그 가능성의 여명으로 희미하게나마 윤곽을 드러내는 이른바 ‘데이타’를 물질로 간주하여 다루려는 시도들의 면모를 보게 되는 것은 우연한 일이었을까. 필자가 앞서서 언급한 작가의 손은 데이터화된 물질data based materials을 단순히 보이지 않는 사이버 상의 알고리듬으로 이해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그것을 적극적으로 미학적 관점을 가지고 심지어 그것을 물질로 ‘다루려는’ 시도를 의미하는 일종의 은유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디지털 시대의 예술 작품에 있어서 작가의 몫이라고 언급했던 것은 바로 전통적인 예술가의 손에 의존했던 물질을 미학적으로 다루려는 시도의 총체적 면모들이 디지털 시대로 수렴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진화라고 이해하고 싶다. 이런 점에서, 작가 주연우는 파운드 푸티지라는 장르의 실험영화의 범주를 한 차원 다르게 끌어 올렸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그것은 디지털 시대의 데이터 물질을 다루는 장인의 모습을 연상시키면서 동시에 그곳으로부터 파생되는 미학적 의의, 곧 새롭게 각조 하려는 형태의 본성이 ‘의미’라고 하는 보이지 않는 조형물이라는 사실인 것이다.
예를 들어, 작가의 신작, 〈Swarm Circulation〉는 크게 세 가지 소재로 구성된다. 첫째, 전자제품 제조 공정, 둘째, 텔레비전 및 신문, 광고 영상 그리고 일러스트, 셋째는 전자 폐기물 쓰레기장의 소각 처리 장면이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바로 1프레임부터 4~5프레임 사이 사이에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주제 요소들이 개입하는 사건이 벌어지는데 서로 다른 장면 들이 짧은 시간 안에 바뀌어 작품이 재생되는 동안 화면은 끊임없이 플리커 효과처럼 깜빡이는 작용을 한다. 이것은 바로 프레임 단위로 빠르게 분할된 쇼트shot들과 연속된 쇼트들 간의 관계를 몽타주 기법 으로 조직해 내는 데 그 효과가 있다고 할 것이다. 더불어 플리커 효과가 목표하는 지점은 바로 ‘시간성의 조작’이 가능해진 디지털 시대의 한 특성을 잘 보여 주는 데에 있다.
덧붙여, 앞서서 설명한 ‘미디어의 껍질’이라고 칭할 수 있는 소용을 다한 미디어 부품들이 한때 담지했던 이미지들을 수많은 사람들은 소비했고, 또 그 소비의 형태로 한때나마 신뢰해 마지않았다. 하지만, 소용을 다한 미디어들은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생산품들이 그러하듯이 용도폐기 되거나 잊혀 진다. 그 부품들이 수행했을 수많은 이미지들마저도 함께 소진되는 것 이다. 여기에서 작가 주연우의 주제는 다시 살아난다. 죽은 것 같았던 그 부품 더미들의 무연한 연기 속에서 새롭게 각인되는 이미지들이 살아 재생산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죽은 이미지들의 폐허 사이에서 부품들을 헤치고 다니는 사람들 자신이 이미 주변부로 밀려난 사람들 the marginalized people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한다. 버려진 이미지들과 주변부로 밀려난 사람들이 변증법적 으로 몽타쥬되어 새롭고 인상적인 이미지를 생산해 내고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이 작품의 주제이기도 하며 영원한 순환과 회귀를 연상케 하는 까닭이다. 쓸쓸히 역사 속으로 묻힐 진실들이 바로 그것을 목격 하는 주변부의 사람들과 동기화되면서 바로 이 순간, 이 짧은 실험영화가 인간학을 담지하고 있는 영상 인류학적인 보고서로 승화되는 지점이기도 한 것이다.
3
새로운 깊이감으로의 진화를 기대하며
작가 주연우는 그의 작품, 〈Swarm Circulation〉을 통해 분봉하는 벌떼의 집단 움직임이 미디어 주변으로 운집하는 현대사회의 첨단 기술과 하드웨어의 집약적 산업에 경도된 군중들을 소비주체로 은유하는 반면, 그 생산 과정 및 소비를 연대기 순으로 짧고 압축적 이되 주제를 동반하는 강렬한 이미지의 연속으로 생물의 유기체적 순환을 그 상징으로 사용하는 세련된 표현을 시도하였다. 속도감 있는 진행과 주제의 병행은 파운드 푸티지found footage라는 새로운 형식미 안에 담기에 좋은 아이디어였다고 판단된다. 기존의 아카이브 푸티지archive footage안에서 수많은 연구와 주제 도출의 시도가 실험을 통해 잘 드러났다고 보이는 이유는 고도의 기획된 이미지의 사용이다. 예컨대, 여러 전자제품의 광고영상들과 그것들이 사라지는 영상의 교차들은 과연 우리가 한때 경도해 마지않았던 이른바, 절대 우위의 기술에 대한 맹목적인 찬사를 변증법적인 몽타주 기법을 통해 기술 비판적이며 문명비판적인 시선까지 상상해 낼 수 있는 여지로 주제를 확장해 가며 외연을 넓히고 있는데, 이것은 깊이 있는 주제의 탐구가 아니고서는 도달하기 어려운 과제임에 틀림없다 하겠다. 따라서 이러한 철학적 문명비판사적인 작가의 깊이 있는 태도와 연구는 다음 작품을 기다리는 관객들을 조바심으로 그 기대감을 대체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차후의 그의 작품 세계가 어디로 또 어떠한 깊이감으로 진화해 갈지 자못 궁금한 것은 비평가인 필자 혼자의 몫은 아니리라.